어슬렁거리며 살기 [임후남의 시골책방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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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슬렁거리며 살기 [임후남의 시골책방 편지] 
  • 박홍규
  • 승인 2020.12.17 2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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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코로나가 끝나고 아이와 여행을 가신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제주올레요.”

얼마 전, 비대면 강의를 했을 때 나온 질문과 답이었다. 이미 시골에 정착한 나와 청년이 된 아들이 제주올레를 다시 걸을 일이 있을까 싶지만, 툭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어리고 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제주올레를 택할 것이다.

그날의 강의 내용은 내가 쓴 책 <아이와 여행하다 놀다 공부하다>였다. 이 책은 한 신문에 ‘교과서여행’이란 칼럼으로 2년 넘도록 연재한 것을 추려서 낸 책이다. 책 제목과 칼럼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 이 책은 아이와 함께 여행할 때 교과와 관계된 곳을 한 번쯤 가보라고 권하는 일종의 여행 정보서다. 주로 초등 사회와 국어 교과와 연계된 곳들이 대부분이다. 책을 낸 입장에서 이 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하는데, 그만 다른 말이 줄줄 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특정한 곳을 ‘찍고’ 오는 것은 사실 여행이 아니다, 진짜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아이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없이 걷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제주올레는 최고의 여행지다 등등.

시골에 정착한 지금은 사실 여행을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지금도 도시에 살고 있다면 나는 끊임없이 짐을 꾸려 떠났을 것이다. 역마살이 낀 것처럼 나는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때로는 아이를 위한 여행도 있었지만, 사실 마음 깊은 여행의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떠날 수 없어 아이를 앞세우고 떠난다는 말을 곧잘 했었다.

오랜만에 옛날 아이와 함께한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이와 함께 다녔던 곳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했던 여행이 얼마나 큰 자산인지 정말이지 새삼스럽게 뿌듯할 정도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 2가지.

#1. 제주올레길을 걸다 할머니 한 분을 만나자 우리는 꾸뻑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귤 한 개와 호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주시면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차마 그 돈을 받을 수 없어 거절하자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인사해 준 게 너무 고마워서.”

#2. 제주올레길을 걷다 밭에서 식사하고 계신 어른들께 인사를 했다. 마침 점심때. 그들은 우리를 불러 콩나물과 쌈장을 넣고 쓱쓱 비벼서 아이에게 내밀었다. 당신들이 먹던 대접에, 먹던 숟가락으로. 아이가 안 먹으면 저걸 다 내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가 아득해질 무렵, 아이는 한 그릇을 뚝딱했다. 나중에 아이에게 물었다. “너 그거 어떻게 먹었어?” “ 그럼 안 먹어요? 어른들이 주신 건데.”

한참 걷기에 빠졌던 시절, 나는 혼자도 걸었지만, 아이와 함께 제주올레를 걷고,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한강 둔치를 걸었다. 짧게는 하루 서너 시간, 길게는 하루 9시간도 걸었다. 북한산, 지리산 등 산에도 자주 갔다. 그렇게 멀리 갈 수 없는 때는 서울을 걸었다. 서촌과 북촌을 걷기도 하고, 합정동을 걷기도 하고, 광화문에서 목동까지 종일 걷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목동까지 걸었을 때는 사직터널을 지나 영천시장을 지나고, 연남동과 서교동을 거쳐 양화대교, 선유도공원, 한강 둔치 등으로 길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런 길을 걸을 때는 대로를 따라 걷지 않았다. 골목을 따라 고불고불, 길을 이어나갔으며 어슬렁댔다. 그저 걸으며 어슬렁대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그곳에서 우리가 본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이었다. 헌책방에 들어가 책도 구경하고, 오래된 골목에 앉아 있는 할머니도 만나고, 플라스틱 화분에 심긴 고추도 보고. 그러다 떡볶이와 만두도 사 먹고, 핫초코도 사 먹었다.

차를 탔으면 후딱 지나갔을 양화대교를 건너면서 좌우로 펼쳐진 한강의 풍경도 맘껏 끌어안았었다. 만약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여전히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여행이었다. 그런 길을 함께 걸어준 아들에게 새삼 고맙다.

믿고 기다리지 못하는 바람에 아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청소년 시절을 지나 이제 20대 청년이 된 아들과 이젠 그 추억을 이야기한다. 함께한 추억이 많아서 그런지, 혹은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많이 한 탓인지 나는 아들과의 대화가 꽤 즐겁다. 아들에게 배우는 것도 많다.

“여행은 있는 곳을 벗어나는 것이잖아요.”

부모를 따라 여행을 했던 아들은 이제 자신만의 여행을 다닌다. 여행지를 선택하고, 여행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그의 몫이다. 이제 자신의 길을 떠나기 때문이다.

시골에 사는 나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매일 변하는 하늘과 바람과 햇살과 나무 들을 보는 것만으로 아직 하루가 꽉 차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상을 벗어나 떠난다면 나는 어딘가를 어슬렁거리다 올 것이다.

#시인 임후남은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사, 웅진씽크빅 등에서 글 쓰고 책을 만들었다. 2018년부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시골책방 '생각을담는집'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펴낸 책으로는 '시골책방입니다' '아이와 길을 걷다 제주올레'가 있고 시집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가 있다. *이 칼럼은 포천좋은신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김승태 에디터 kdf@kd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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