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 시인 박상천, 가을 별마당에서 '그녀를 그리다, 노래하다' [KDF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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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시인 박상천, 가을 별마당에서 '그녀를 그리다, 노래하다' [KDF 詩人]
  • 이수빈
  • 승인 2022.10.0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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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한양대 명예교수,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 명사 초청 특강

덮고 있는 이불이 여름 거 그대로임을 알았다. (중략) / 시퍼런 가을 하늘도, / 하얀 눈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의미 없는 시간의 한 구석 어딘가에 / 나는 버려져 있을 뿐이다 (중략) / 이불장 속 압축팩 지펴를 열면 / 그 계절의 따뜻한 냄새가 부풀어 오르며 / (그녀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이불' 중에서) 

만추의 시작에, 박상천 시인의 별마당 특강 '시, 일상 속 발견과 깨달음의 미학'이 삼성동 스타필드 별마당 도서관에서 지난달 30일 성료됐다.

이번 특강은 9월 한 달 동안 매주 금요일 진행된 명사 초청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다. 별마당 도서관은 2017년 개관 이래 명사 초청 특강과 공연, 북콘서트 등 500여 회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이번 9월의 금요일에는 구본창 사진작가, 지리학자 박정재 서울대 교수, 한비야 국제구호 전문가 등이 앞서 특강을 펼쳤다.  

1980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박상천 명예교수는 한양대에서 30년 넘게 문학과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강의했던 경험을 특강 현장에서 풀어냈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반복적인 일상의 지루함을 깨고, 여행자의 눈으로 일상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박 교수는 '김영철의 골목기행'을 예로 들며 청중의 눈높이에 맞춰 강의를 이어갔다.

박 교수는 최근 펴낸 시집 '그녀를 그리다(나무발전소)'에 수록한 시들을 통해 일상을 낯설게 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지난 5월에 출간된 '그녀를 그리다'는 아내와 급작스런 사별 이후, 10년 동안의 그리움을 노래한 '제망부가(祭亡婦歌)'다. 

우리 인생엔 어느 날 갑자기 어둠 속에 버려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시인에겐 아내와의 사별이 그랬다. 2013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는 박인숙 전 일간스포츠 문화부장이다.  

사별 후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남아 있는 아내의 흔적들에 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뿌리내린 세상과 꽃을 피운 세상이 다른,/ 참 특이한 주황의 꽃이/ 담 너머 또 다른 세상을 넘겨다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참 좋아했던 꽃, 능소화./ 당신./ 딸과 남편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이렇게 넘겨다보고  있나요? ('능소화' 중에서)

시인은 담 너머 고개를 내민 능소화를 보고, 바로 아내를 떠올린다. '뿌리내린 세상과 꽃을 피운 세상이 다른, 주황색 꽃'을 통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살뜰한 마음을 입혀버린다. 

삼성동 스타필드 별마당에서 30일 진행된 박상천 특강 '시, 일상 속 발견과 깨달음의 미학' 

‘시간이 지나면서 연골이 점차 닳아 없어지는 퇴행성 관절염,/ 우린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지만 / 일상의 모든 관절이 갑자기 / 삐걱거리고 아프게 되어 버린 / 당신과의 이별// 일상의 관절 사이 사이에 / 숨어 있던 당신이 /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후, / 나는 뼈와 뼈가 맞닿아 / 뜨끔거리는 통증으로 다리를 삐걱거리며 / 오늘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연골' 중에서)

시인의 작품에 대한 설명에 공감한 특강 참가자들은 즉시 열띤 호응을 보였다. 또 박 교수가 상기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실감을 표현한 시를 읊자 청중들은 커다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오른쪽) 별마당 특강 후 나무발전소 김명숙 대표한 함께한 박상천 시인 

아내가 떠난 이후 '절전모드'로 시간을 보냈다고 밝힌 박 교수. 이제는 고개 들어 자신의 삶을 이어가도록 시선을 지평선에 맞출 때라며 "시를 통해 일상 속의 새로움을 깨달고, 지루한 삶을 환기하며 살아가자"는 말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이제 여기서 당신에 대한 시는 / 마무리하려고 한다. // (중략) 당신은 씨익 웃으며 말하리라. / 뭘 우리가 그렇게 뜨거웠다고 시까지 써? // 그래 처음 만나 결혼을 하기까지 / 넉 달 동안의 뜨거움은 / 결혼 후 이내 사라졌지만 (중략) 

이제 당신을 그리는 시는 그만두려 한다. // 잘 지내, / 가끔 찔레꽃, 능소화, 수국으로 당신이 보낸 소식 들으며 / 나도 그렇게 지내 볼께 안녕. ('그녀를 그리다, 마지막' 중에서) 

만추가 시작되는 지금, 박상천 시인은 천상 시인이었다. 

이수빈 기자 kdf@kd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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