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Free!] 파이어族과 플렉스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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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Free!] 파이어族과 플렉스族
  • 박주범
  • 승인 2020.12.02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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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자고 일어나면 신조어가 생긴다. 모르는 단어를 모른다고 했다가는 괜한 망신을 산다. 입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검색해 보는 게 상책이다. 

막상 알고 나면 알 필요가 없었던 게 대부분이다. '공부 안 할 권리'가 자꾸 침해 당한다. 결국 앎을 강요당한 꼴이다. 파이어(fire)와 플렉스(flex), F로 시작하는 이 두 개의 조어도 요즘 자주 나와 모르고 넘어갈 재간이 없었다. 이젠 신조어도 아니지만.

파이어족(族)은 ‘경제적 자립, 조기 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첫 글자를 따서 생겨난 용어다. 40대에 은퇴하기 위해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 소득의 70~80%를 저축하는 2030세대를 지칭한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 조사를 인용해 미국 24~39세 가운데 저축액이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 이상인 이들의 비율이 25%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2018년(16%)에 비해 9%포인트가량 상승한 수치다.

한국은행이 이 슈퍼세이버(파이어족)의 등장을 우려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미국 중앙은행(Fed)도 비슷한 이유로 ‘파이어(FIRE)족’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 파이어족 증가가 국내총생산(GDP)의 70%대를 차지하는 민간소비를 갉아먹고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리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옳은 분석이라고 치자. 아껴서 생존해 보려는 서민들이 국가 경제를 위축시키는 주범이라고 치자.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짠돌이 · 짠순이 때문에 경기가 악화되니 '좀팽이 단속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플렉스(flex)는 사전적으로는 ‘구부리다’, ‘몸을 풀다’라는 뜻이지만, 1990년대 미국 힙합 문화에서 래퍼들이 부나 귀중품을 뽐내는 모습에서 유래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부나 귀중품을) 과시하다, 뽐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신조어라기보다는 요즘 더 유행이 됐다고 봐야 한다. 

유튜브가 이 유행에 한 몫 했다. 이제는 비싼 요리를 ‘사줘’ 하지 않고, ‘플렉스 해줘’라고 한다. 명품을 쉽게 쇼핑하고 자랑질하는 모습에 약 오를 때도 있지만, 돈이 열어주는 신세계에 들어가 롤러코스터를 타듯 (명품을 손에 쥐는 것이 아닌) 비명을 지를 기회가 공짜로 생긴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몰랐던 부자들의 럭셔리한 세계는 확고하게 존재하고, 그걸 보는 일은 일종의 '자존감 학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보게 된다. 플렉스가 목적인 유튜브 컨텐츠가 전세계적으로 넘쳐나고 조회수가 높은 이유다. 

소비경기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 짠돌이 파이어족을 닥달하기보다는 부자들이 맘 놓고 돈 쓰게 하거나 있는 돈으로 마음껏 ‘플렉스’하게 하면 어떨까?

비행기 일등석, 클럽이나 뮤지컬극장 VIP석은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게 해준다. 떳떳하게 자기 지위를 알릴 수 있는 심리적 양탄자를 깔아 준다. 고깃집, 횟집, 노래방도 좋은 방을 차지하려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곳이 많다. 이 상황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불평등한 건가? 그럼 이건 어떤가. VIP석을 골목 식당까지 확대하면. 대신 일반석 요금이 싸져도 ‘위화감’ 조장한다고 할건가. 카페나 일반 식당도 창가 추가요금, 넓은 좌석 추가요금, VIP 주차 추가요금을 받게 하자. 지갑 뚱뚱한 사람들이 맘껏 플렉스하고 지갑을 열도록 말이다.

1인석에 혼밥 하는 사람에게는 자장면을 5000원 받고, 똑같은 자장면을 룸에서 오랜 시간 밀담하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1만원 받으면 자장면 평균 가격은 7500원이다. 일전에 "저가 여행패키지가 왜 싼가요?"라고 묻자, "같은 패키지로 갔어도 가이드가 권하는 상품을 플렉스하는 부자 일행들 때문에 가능한 가격입니다"라고 답하는 어느 여행사 사장님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마트에서도 누군가는 구매(플렉스)하기 때문에 공짜 시식이 있는 것이다.

구독자 70만명을 상회하는 유튜브 ‘스튜디오 룰루랄라’에 출연한 박세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먹거리를 자기 식탁에 펼쳐 놓고 먹는 걸 봤다. 

한우 새우살 600g 15만 6000원
캐비아 30g 15만원
독도새우 1kg 17만원
트러플 2송이 14만 3000원

한 끼 60만원이 넘는 집밥이다. 이 장면을 보며 국민 골퍼 세리가 사치 부린다고 욕하는 사람이라면 유튜브 계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찾기는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기에.

거리두기 단계 격상으로 대부분의 서민과 자영업자들이 한계에 다다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번민한다고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다. 더 많은 부자들이 편하게 돈 쓰고 다니는, VIP석이 널린 거리를 상상이라도 해본다. 파이어족의 대안이 플렉스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아직 거리는 춥다.)

글. 이인상 칼럼리스트. 항상 세상과 사람과의 소통을 꿈꾸고 있다. 현재 문화미디어랩 PR컨설턴트로 근무하고 있으며, LG그룹 • 롯데그룹 등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다.
dalcom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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